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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 1945년
운영자 2016-04-07 추천 3 댓글 0 조회 1867






ㅇ 1909년  3월              부해리선교사 이안면 증촌리에서 창립 

제목  부해리(傅海利, Henry Munro Bruen, 1874~1959)
 주제어  브루엔 [선교사] [내한 선교사]
 자료출처  송천100년사  성경본문  
 내용

부해리 선교사부해리 선교사의 원래 이름은 브루엔[Henry Munro Bruen, 1874~1959 부해리(傅海利)]이며, 부해리는 한국에 와서 지은 이름이다. 그는 1874년 미국 뉴저지주 서미트(Summit)에 위치한 중앙 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있던 제임스 브루엔(James DeHart Bruen)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후 12세 때 어머니[Margaret White Munro Bruen]의 별세로, 할머니인 안나 브루엔(Anna Miller Bruen)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조부[James McWhorter Bruen] 또한 목사였으며, 조모(祖母)는 당시 저명한 성경 학자였으며 교회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선교 악단(Mission band)을 조직하여 가르치기도 했을 정도로 열성적이었고, 부해리의 가정은 할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부해리는 1892년 장로교 기숙학교인 블레어 홀 아카데미(Blair Hall Academy)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22세 때인 1896년 프린스턴(Princeton)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후 그의 부친과 조부가 졸업한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신학 공부를 한 후 1899년 졸업하고 그해 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에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해 10월 26일 세 번째 선교사로 대구에 도착하여 안의와,장인차 등과 함께 대구,경북 지역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대구는 1899년 5월 1일 한국에서는 4번째로 선교기지인 스테이션(Station)이 공식 개설된 곳으로, 이미 1897년부터 선교기지로서 실질적인 활동을 해 왔었다. 대구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행정,경제,교통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기지가 개설됨으로써 개신교 선교의 중심지 역할까지도 담당하게 되었다. 

25세 미혼 총각의 몸으로 대구에 도착한 브루엔은 그후 한국식 이름을 부해리(傅海利)로 정하였는데, 이는 그의 애칭인 해리 브루엔(Harry Bruen)에 발음이 가장 가까운 말을 딴 것이었다. 그는 2년 후인 1901년 그의 약혼자이며 동창생인 마르타 브루엔[Martha Scott Bruen, 1875~1930 부마태(傅馬太)]과 결혼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듬해 5월 대구에 돌아왔다. 그들은 슬하에 두 딸을 두었다. 1902년 5월 대구에 온 부해리는 선교사들 간의 경북지방 선교 구역 분할로 경북 서부지방, 즉 김천,선산,군위,고령,성주,상주,칠곡 등지의 선교를 담당하여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외 경산,영천,포항 등의 동부지방은 안의와, 안동,봉화,영주 등지의 북부지방은 1902년 대구 선교기지에 임명되어 온 바렛[W.M. Barrett, 1872~1956 방위렴(邦緯廉)]이 맡게 되었다.

  1903년 부해리 목사는 안의와의 후임으로 대구 제일교회를 담임하였고, 1904년에는 대구 성경학원(聖經學院)의 남자 조사반(助事班)을 맡아 수업을 진행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의료 선교사로 부산에서 활동하던 어빈[Charles H. Irvin, 1862~1933 어을빈(魚乙彬)]과 빈턴[C.C. Vinton, 1856~1936 빈돈(賓頓)] 등과 함께 1916년까지 나환자 선교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12년 1월
경상노회(慶尙老會) 조직에도 크게 기여하여 1913~14년에는 경상노회 7, 8회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5년에는 대구 남산교회를 세워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이후 1920년까지 당회장으로 시무하였다.

  한편 부해리 목사의 부인 부마태 여사는 미국에서 결혼한 후 1902년 5월 대구에 부임하여, 그해 제일교회 구내에서 신명여자소학교(信明女子小學校, 현재의 종로초등학교)를 세웠다. 이후 1907년 10월에는 동산(東山) 위의 5칸 짜리 일자형 한옥인 부인용 사랑채를 교사(校舍)로 하여 신명여자중학교(信明女子中學校)를 설립하여 특히 교육부문에서의 선교활동에 힘썼다. 이로 인해 현재까지 그녀는 대구,경북지방 여성교육의 창시자로 불리고 있다. 또한 남문안 예배당의 여자 주일학교 교장, 부인전도회 및 경북 여전도회 연합회의 조직과 운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1930년 10월 유방암으로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55세의 나이로 28년 동안의 대구생활을 마감하고 소천하였다. 부마태는 평소 “선교 사업에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부해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을 힘껏 도와주고 싶은 한가지 욕망 때문에 대구로 간다”고 했을 정도로 부해리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그의 유해는 동산의료원 구내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묘비의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마르다  묘
마르다 녀사는 一八七五년 四월 十일 미국 펜셜페니아쥬  화잍헤빈셩에셔 츌생하여 一九○二년 五월 十일 션교사명으로 죠션에 오다 녀자 교육긔관 대구 대남 신명 두 학교를 셜립하고 부군 션교사 부해리와 함ㅅ긔 교회사업에 종사하다가 一九三○년 十월 二十일 별셰함


                                          

부마태 선교사그후 부해리 선교사는 부마태 부인이 별세한지 4년만인 1934년 9월 부마태의 친구이며 동산병원 간호사로 일하던 클라라 헤드버그[Clara M.Hedberg, 하복음]와 재혼하여, 슬하에 브루엔 주니어(Henry Munro Bruen Junior)를 낳았다. 하복음은 동산 기독병원의 간호 선교사로 1923년부터 간호과장으로 있으면서 1925년 10월 의무과장 손인식과 병원 사무장 김덕수의 협조로 동산 기독병원 구내에서 부속 간호부 양성소를 설립했다. 그녀는 1941년까지 그곳의 간호부 양성소 소장으로 있었으며, 모두 18년 동안을 동산병원에서 근무했다.

  부해리 선교사는 평소 매우 성품이 소탈하고 한국어로 유창하게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 사람들과 그 문화에 친숙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믿음과 사랑,인내의 선교사였다. 부해리 목사와 가깝게 생활했던 사람들은 그를
'천사(天使)' 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 지역 교인들과 두터운 정을 나누고 가신 분이다. 이러한 모습은 계성학교 교장을 지낸 헨더슨의 다음 회고 에서도 잘 나타난다.

  부해리는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번 만난 사람의 얼굴은 좀처럼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우리 두 사람(부해리와 현거선)이 같이 시골길을 가고 있었는데 마침 여러 명의 사람들이 우리 옆을 지나갔다. 이때 부해리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한 사람을 불렀다. “김영태씨 ! 안녕하십니까 ?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잠시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눈 다음 우리는 다시 길을 걸어갔다. 부해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까 그 사람은 내가 17년만에 처음 만난 사람입니다”.
  부해리는 한국어로 성경 말씀을 인용하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예배 시간에 성경 봉독 순서가 되면, 그는 강대상 앞에 나가 봉독할 성경 구절을 먼저 말하고 교인들에게 성경을 찾게 한다.(당시 한국 교인들은 성경, 찬송을 늘 지니고 다녔다). 교인들이 성경 구절을 다 찾고 나면 부해리는 성경을 보지도 않고 그 구절을 모두 외워서 낭독하였다.
  부해리는 또한 교인들을 만나면 그때, 그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성경 구절을 들려주는 습관이 있었다. 나(헨더슨)는 부해리와 여러 해 동안 대구 선교기지에서 같이 일하고 지냈지만 한번도 화를 내거나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정적이었고, 결코 위선적이지 않았다.
  그는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이었으며, 깊은 경건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모든 선교사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는 전도를 다닐 때는 자전거를 이용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자전거가 매우 귀하여 이를 '안경말' 또는 '비거(飛車)'라고 불렀다. 워낙 자전거가 신기하여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기회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전도를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놀라운 기계들이 하나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 것 같이 됩니다. ...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기술있는 사람이 됩니다.”


부해리 선교사 전도 모습


또한 부해리 목사는 '마아크(Mark)'라는 사냥개를 키웠는데, 전도를 나갈 때는 사냥개를 데리고 다니곤 했다. 우리 나라의 토종개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사냥개를 처음 본 구경꾼들이 모여들면 자신이 훈련시킨 개를 옆에 자랑삼아 앉혀두곤 모인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을 들려주며 전도를 했다.
  또한 부해리 선교사는 대구 동산병원 초창기 때에 존슨(장인차) 의사의 병원 수술을 도와주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부해리 선교사는 존슨이 시키는 대로 환자를 마취하는 일을 했는데, 이는 존슨의 말을 알아듣는 간호사 또는 보조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당시 대구 선교기지에서는 나환자 구제사업을 위해 1917 ~18년 사이에 동산병원 인근에 나환자 요양소 부지를 확보하고 병동과 진료실, 예배당 건물을 지었다. 요양원 교회는 100여명의 환자를 수용하고 있었는데, 당시 부해리 선교사는 이곳으로 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하며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나환자들이 찬양하며, 설교를 듣는 모습을 통해 기쁨을 느끼며
감동을 느낀 기록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그들은(나환자들) 가끔 그들의 질병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질병이 아니었더라면 구주를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 나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얼굴이 주님의 모습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송천교회의 창립 이후 1938년까지 당회장을 지낸 부해리 선교사는 일제의 진주만 침공 전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으로 1941년 9월 19일 67세의 나이로 한국을 떠나 1944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하기까지 대구에서 그의 선교 사역의 대부분인 43년간을 헌신하였다. 그는 1959년 3월 26일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츠(Santacrutz)에서 85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부해리 선교사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는 과정에서 1900년 영천군 대창면에 조곡교회(助谷敎會)를 세운 이후 경북 서북부 지방(김천,선산,칠곡,상주,안동등)과 대구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다.

 

 자료 ; 한국컴퓨터선교회



ㅇ 1919년   7월              구향리에서 주일집회 시작

ㅇ 1920년   3월              오사리에 예배당 건축

ㅇ 1930년                       일제 탄압으로 교촌리에 이사

ㅇ 1945년                       구향리 130번지(현지)에 25평 예배당 건축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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