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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총회 역사
정광수 2013-05-28 추천 0 댓글 0 조회 2790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역사

창립총회 이전의 역사                    

 

 

 

이미 중국은 런던 선교회 소속 모리슨 선교사가 자리를 잡고 선교를 펴나가고 있었다. 그의 선교 활동이 구라파에 알리어지자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에 와서 활동하게 됐다 그중 구출라프 선교사가 1832년 7월 중국 위해를 떠나 충청도 안면도에 상륙하고 홍주 읍에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하려고 하였지만 홍주성 관리의 거절로 철수를 하였다. 그 후 토마스 선교사는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중국 상해에서 활동을 하였지만 부인이 그만 그곳에서 사망하는 비극을 만나게 된다. 이후 그는 상동성 연태에서 통역하는 일을 하다가 조선 천주교 신자를 만나 스코트랜드성서공회 윌리암슨 총무로부터 한자성경을 받아 이들에게 전하고 이들의 안내로 황해도 앞바다에 널려 있는 여러 섬들을 순해하면서 2개월 반 동안 활동하였다.

 

 

 

 


 

 

이후 스코트랜드성서공회 윌리암슨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기 위해 본국으로 연락하여 중국 요령성 영구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로스, 메킨타이어,헌트 선교사는 한국 선교를 위해서 많은 기도를 아끼지 않았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지 10년 후인 1876년에 뜻하지 않게 의주 청년 이응찬을 만나게 됐다. 이때 로스 선교사는 그를 어학교사겸 조사로 함께 일을 하게 했다. 그 후 이응찬을 통해서 의주 청년 백홍준,이성하,김진기 등을 선교사에게 소개하고 이들이 1897년 메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역시 로스 선교사를 만나 이들도 세계를 받고 이응찬과 함께 로스 선교사와 협력하면서 요령셩 심양으로 선교지를 이동하고 그곳에서 누가복음,요한복음을 함께 번역하여 1882년 봄에 심양에서


최초로 출판을 하게 됐다. 이때 쪽복음을 완성하는데 식자공으로 수고했던 김청송은 옛 고구려 고도 즙안을 중심해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1884년 11월 로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최초로 75명이 세례를 받고 즙안에 최초로 한국인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됐다. 1887년 신약전서를 완역하여 발간하였는데 이 번역본을 흔히들 로스역이라 말하고 있다. 의주 청년들은 고향을 드나들면서 기독교 서적을 반입할 수 없는 때 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 국경을 지키는 수비병을 피해서 한국으로 성서를 반입했다. 



 

 

이수정은 1882년 임오군란에 명성황후 민 비를 도와 충주로 피난했던 것이 생명의 은인이 되어 그의 협조로 1882년 10월 w2차 신사유람단 비수행원으로 일본 동경을 방문할 수 있었다. 비 수행원이었던 이수정은 독 일본 기독교 지도자 짜다센을 방문하여 여러 가지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한자로된 신약전서를 선물로 받고 자신의 숙소에 돌아오게 됐다. 이수정은 쯔다로부터 감동을 받고 신약전서를 읽기 시작하여 결국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됐다. 이후 그는 일본 목사와 일본 주재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1883년 4월로 월정교회(현재는 시바교회)에서 야스가와와 낙스 선교사의 협력으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 그 후 이수정은 일본에 있는 일본 
주재 루미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마가복음서를 번역하게 됐으며, 다시 낙스 루미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선교사 유치 운동에 나사게 됐다. 그해 7월 11월 2회에 걸쳐서 미국 교회에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이 미국 선교 잡지에 발표되자 이를 읽어 보았던 미국인 실업가 맥윌리암스가 선교비를 약속하여 한국 선교의 문이 열리는 좋은 기회가 됐다.
이러한 소식을 접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중국 상해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던 알렌을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고 1884년 9월 20일 인천에 상륙하였다.

그 후 이수정마가복음서를 완력하고 요꼬하마에서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 선교사 협력으로 출간을 하고 미국엣 올 선교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미 북장로교회에서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미 감리교회에서는 아페젤러 선교사를 보냈고 이들이 일본 가로하마에 머물면서 이 수정을 만나 한글을 배우고 드디어 한국을 향해 떠나게 됐다. 이들의 양손에는 마가복음서가 들려있었으며 그렇게 바라던 한국의 선교사 이루어지자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언더우드는 곧바로 서울로 입성을 하였지만 아펜젤러 부부는 국내 사정이 불안함으로 인천에 머물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됐다.

그해 5월에는 미국 감리교회의 스크렌톤 선교사 가족이 입국을 하였으며 이 무렵 미국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헤론 부부도 함께 입국 하였다. 잠시 일본에 머물렀던 아펜젤러도 부인과 함께 입국을 하였다. 이때 알렌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사건으로 실력자 민영익이 개화파에 의해 상처를 입자 이를 치료하는 담당의사가 됐다. 알렌은 정성을 다해 치료를 임하여 결국 상처가 치료되어 1885년 5월 고종황제로부터 하사금은 물론 광혜원이란 병원 건물까지 받게 됐다.
이 후 1885년 아펜젤러는 정동에 배재학당(배재고등학교)을 설립하였으며 1886년 언더우드도 정동에 예수교학당(셩신고등학교) 스크렌톤 대부인은 이화학당(이화여자고등학교) 1887년 엘러스는 정동여학당(정신여자고등학교)을 차례로 설립하였다. 다시 1887년 9월에 언더우드는 정동로교회(새문안교회), 아펜젤러는 정동 감리교회(정동제일감리교회)를 최초로 설립하면서 한국에 교회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게 됐다.

자료출처  예장통합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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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해가 해가 갈수록 선교사들이 속속 내한하고 이에 뒤질세라 1889년 호주 장로교회에서도 데이비스(J. H. Davis) 남매가 내한하였다. 1892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1898년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등이 입국을 하면서 한국 선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입국하자 1893년 1월에 장로회미선교공의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들은 1893년 예양협정을 체결하고 각 지역별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미 북장로교회는 서울 일부와 평안남북도, 황해도, 경상북도, 충청북도, 호주 장로교회는 경상남도, 미 남장로교회는 전라도와 충청남도 서남부 일부를,
 

캐나다 장로교회는 함경도 북간도 지방을 각각 맡고 선교부를 설치하면서 선교에 힘을 쏟고 있었다.
1901년 9월 선교사 25명과 한국인 장로 등이 함께 모여 장로회공의회를 조직하였다.이 공의회는 장로회로서는 최고 처리 기관이었으며 따라서 각 지역마다 대리회를 조직하였다. 경기충청대리회를 비롯해서 평안남대리회 평안북대리회 황해대리회 함경대리회 전라대리회 경상대리회 등 이었다.
대리회에 속한 선교사와 한국인 장로 및 조사들의 노력으로 교회가 점점 왕성해져 1907년 9월 선교사 38명 목사 33명 장로 36명이 출석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가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조직됐다
 
 

이 때 회장은 마포삼열 선교사가 선임됐으며 때마침 1907년 9월 이 독노회에서 제 1회 장로회산학교를 졸업한 7명(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송인서)등이 최초로 목하 안수를 받았다.
이들 7명중 이기풍 목사는 독노회 창립 기념으로 제주선교사로 파송하였으며 나머지 목사 6명은 각 지방에서 선교사와 함께 일할 수 있도록전도 및 동사목사로 허락을 하였다.
매년 9월이 되면 독노회가 모였지만 1911년 9월 대구에서 모이는 제 5회 독노회에서 대리회를 승격하여 노회로 조직하기로 하고 폐회하였다.

 

1911년 11월 전라대리회에서는 전라노회를 조직하면서 각 지역마다 대리회를 노회로 개편하고 역사적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 1회 창립총회가 7개 노회에서 선출된 총대원 목사 96명(선교사 44명 한국인 목사 52명)과 장로 125명 도합 221명이 1912년 9월 평양에 있는 장로회산학교 강당에서 제 5회 독노회장 이눌서 회장의 사회로 개회 예바를 드렸으며 초대 총회장에 원두우 선교사를 선출하였다. 역시 총회를 조직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중국 산동성으로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목사를 파송키로 결의 하였다.

 

1913년 9월 제 2회 총회는 원두우 총회장의 사회로 서울 안동교회에서 개회를 하고 곧 이어 장소를 서울 승동교회로 이동하여 회무를 처리 하였다. 이때 총회장은 호주 장로교 선교사 왕길지 제 3회 총회장은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배유지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임하였다 다시 1914년 9월 제 4회 총회는전주 서문교회에서 목사 60명 선교사 50명 장로 60명이 모였으며 총회장은 최초로 한국인이며 장로회산학교 2회 졸업생인 김필수 목사를 선임하였다. 원래 김필수 목사는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서 이눌서 선교사의 조사로 전주 서문교회에서 장로로 장립 받고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 1909년 졸업을 하자 다시 전도사로 활동을 하다가 졸업한 그해 9월 목사 안수를 받고 전라노회에서 전북 동북부지방 전도 목사로 사역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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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탄압과 한국교회의 저항

 

 

일제는 강제적으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이 일로 한국은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만나게 됐다. 한일합병을 눈앞에 둔 장고회공의회에서는 길 선주 장로의 제안으로 11월 추수 감사절이 끝나면 그 다음날부터 한 주간 구국 기도회를 개최키로 하였다. 이 기도회를 통해서 일제의 무서운 침략이 서서히 한반도에 몰려오는 것을 전국교회가 알게 됐다. 노일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독 한국을 식민지로 전환하는데 안간힘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매국노들은 나라를 송두리체 일제에 넘겨주는 슬픈 일을 만나게 됐다. 이때 여기저기서 의병 운동이 일어났으며 상동교회 전덕기 전도사는 도ㅓ끼를 메고 가서 대한문 앞에서 항소문을 낭독하는 등 을사보호조약을 무효화하는 운동을 전해하였다.


한국 교회는 교회가 있는 곳마다 선교사들이 선교부별로 남녀미션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ㅣ켰다. 여기에 이동휘 같은 교인은 사립학교 100개를 설립하는 운동도 전해하였으며 이승훈 장로는 평북 정주에 오산학당과 오산교회를 설립하고 민족심과 애국심을 불어 넣었다. 그러나 일제는 군사적으로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을 이루자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됐다. 그리고 서북지방의 기독교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많은 기독교인을 구속하고 탄압하였지만 윤산온 선교사 부인은 조작된 사건을 알고 이를 전 세계에 알리자 일제는 할 수 없이 이들을 모두 무죄로 석방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조금도 늦추지 않고 동화정책이란 미명하에 모든 초등학교마다 일본군인 예비역을 동원하여 교사로 채용하고 공포분위기에서 교육을 받았다. 여기에 토지조사라는 이름 하에 신고하지 dskg는 토지는 모두 몰수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만들고 몰수 했던 땅을 일본인에게 싼 값으로 팔아 넘겼다. 땅을 빼앗긴 한국인은 할 수 없이 노동자로 전락하고 한강 이남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됐으며 그 이외의 지역은 만주 간도지방으로 대거 이주해 갔었다. 조선 총독부 정치는 가면 갈수록 혹독한 정치가 이루어지자 자연히 탄압을 받았던 일부 시민 농민들이 교회로 몰려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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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한국 교회

 

미션학교와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서 또는 성경책을 보면서 국권회복과 독립운동심이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게 됐다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란 케치플레이를 내 걸고 약소민족들이 독립 할 수 있도록 힘을 바쳐 주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하던 일본 동경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동경 조선 YMCA회관에서 약 400명이 모여 2.8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그 선언서를 각국 공사 및 일본 각부 대신 및 국회의원들에게 전달하였다. 이들 중 주모자들은 동경 경시청에 연행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그런데 이소식이 곧 본국에 알리어지자 천도교의 최린 손병희 등에게 전하여 졌으며 손병희는 이 민족적인 거사를 기독교와 함께 해야 한다는 뜻에서 평북 정주에 있는 이승훈 장로에게 먼저 연락하여 서울에서 상면을 하고 3.1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됐다.
일하게 하여 자금은 천도교 측에서 부담하고 인원동원은 기독교가 맡기로 하였다. 
 

여기에 최남선으로 하여금 3.1 독립운동 선언서를 작성케하고 이를 독 인쇄하여 전국 각지에 배포하였다. 여기 33인의 민족대표들 중 기독교인이 16명(길선주 김병조 양전백 유여대 이승훈 이명룡 이갑성 이필주 김창준 박희도 박동완 신흥식 신석구 오화영 최성모 정춘수)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이었다. 민족대표 33인중 29명이 3월1일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자진해서 경찰서에 신고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모두 체포됐다.
한편 이른 아침부터 시내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가방 속 깊이 숨기고 등교를 하였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오전 수업만 받고 탑골공원으로 향하였고 시간이 갈수록 학생 시민들의 수는 많아졌다. 그러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 때 경신학당 출신으로 황해도 해주읍 남본정교회 정재용 전도사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독립선언서 한 장을 들고 나가 약 4천여 명이 모인 군중에 나타나 큰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청중들은 갑자기 조용해 졌으며 그의 카랑 카랑한 목소리만 탑골공원을 가득채운 정충의 귀에 울려 퍼졌으며 어느덧 인왕산에 부딪치어 메아리로 다시 서울 시민들의 귀에 들려왔다. 여기에 모인 시민 학생들은 공약삼장의 약속대로 질서정연하게 시가행진에 돌입하였다.

같은 시간에 평양에서는 제 7회 총회장 김선두 목사가 진두지휘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 일로 그는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3.1운동으로 한국 교회는 많은 피해를 당하였다. 이 시위가 지방으로 확산 되면서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교회가 전소되고 교회 지도자들이 대거 검거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종교별로 체포된 인원을 파악해 보면 기독교인이 3,348명(장로교 2.468명 감리교 560명기타 320명)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천도교 및 시천교가 2,200명 이었다. 여기 시민학생들은 12,311명이지만 학생들은 거의가 미션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여 구속자가 많았다 수적으로 볼 대 기독교인들 중 장로교 교인이 더 많이 참여하였으며 당시 장로교 교인은 16만 명이었으며 감리교 교인은 3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총회장 김선두 목사의 구속으로 제 8회 총회는 1919년 10월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회집하여 부회장인 마포삼열 선교사가 개회선언을 하고 총회장으로 당선됐다. 매년 9월에 개회하던 총회였지만 총회장 김선두 목사가 석방되지 않아 할 수 없이 10월에 총회를 개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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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결의와 반대 운동

 

 

일제는 3.1 운동이 지난 후에 무단정책에서 문화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어느 정도 언론의 자유와 비판의 자유를 주었지만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한국교회를 일본적 기독교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 단행했던 것이 신사참배 강요였다. 중일 전쟁을 일으켰던 일제는 한국에서 가장 저항 세력이 강한 장로교 총회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감리교회는 양주삼 감독이 신사참배는 이본의 국민의식이기 때문에 모든 교회가 신사참배를 하도록 권유를 내렸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일본기독교대회 대회장 도미다 목사가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면서 신사참배는 종교화 무관하며 일본의 국민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있는 기독교회 대표자들은 일본인 오다나라찌(한국명 전영복) 목사를 총청하여 숭실대학 강당에서 일본 신사참배에 대한 강연을 듣고 이는 십계명을 어기는 처사라고 강력하게 한국교회가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을 듣게 됐다. 이러한 강연을 들었지만 이미 평양노회에서는 신사 참배를 결의하자는 헌의안이 총회에 상정됐으며 지방 몇몇 노회에서도 상정해 놓고 있었다.


1938년 9월(제27회)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는 모이는 총회에 목사 86명 선교사 22명 장로 85명 계193명이 모인 가운데 이문주 총회장의 신앙생활의 3대요소 라는 제목으로 개회 설교를 하였다. 이어 총회 임원 투표가 실시되자 총회장에 홍택기 목사 부회장 김길창 목사 등이 당선됐다. 이날 총회는 개회 첫날부터 분위기가 이상하였다.

둘째날 오전에는 홍택기 총회장의 사회로 개회됐다. 일본인 평남 도지사 이시다가 축사를 하였으며, 이어서 일본 기독교회를 대표해서 아끼쯔기 미야다 목사 등이 축사를 하였다. 새로 선출된 홍택기 총회장은 평양 평서 안주 노회에서 상정한 신사챔배 결의 및 성명서 바표의 제안 건을 채용하기로 가결하였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도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려행하여 추이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사시국 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써 적성을 다하기로 함”

이러한 성명서를 책택할 때 선교사들은 강한 어조로 아니오 라고 반대의사를 표시했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고등계 형사들의 제지로 그 뜻은 무산됐다.  
 
이때 선교사들은 전원퇴장을 하였으며 부회장 김길창 목사의 인솔로 각 노회 대표자들이 평양 신사에 가서 신사참배를 하고 다시 회무가 진행됐다. 이로서 제 27회 총회는 장로교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강력하게 반대 운동을 전개했던 일부 목사들을 사전에 예비검속 하는 등 철저하게 차단을 하였다. 이 무렵 4개 선교부에서 운영해 오던 장로회신학교는 졸업반 학생만 통신으로 교육을 시키고 졸업생 배출하였으며 선교사들은 신학교를 폐교하고 철수를 하였다. 이미 이러한 선교사들이 설립했던 대부분의 미션학교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때문에 1년 전에 자진 폐교를 단행하였다.


여기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즉시 호남 지방에 있는 모든 노회와 단절하고 독자적으로 선교 운동을 전개했지만 일제의 감시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다른 선교 부의 선교사들과 함께 철수를 하였다. 비록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를 하였지만 끝까지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했던 이북에서는 주기철 목사를 비롯해서 많은 목사 장로들이 이남에서는 박연세 목사 등 많은 목사 장로들이 반대하다가 옥고를 치루었다. 옥에 끌려간 반대자들은 2천여 명이 넘었으며 이중 순교한 사람들도 50여명이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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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해산과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출현

 

 

장로회신학교가 폐교되자 친일 세력들은 서울에 조선신학원을 설립하자고 총회에서 결의를 하자 교세가 강한 이북 세들은 그냥 있을 수 없다 하여 채필근 목사를 중심해서 1940년 4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평양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에 편입학했던 신학생들은 이미 장로회신학교에 다니다가 편입한 학생들도 있었다. 교장은 채필근 목사가 선입됐다. 한편 서울에서 설립하려고 했던 조선신학원은 경기도 학무국으로부터 사설학원 인가를 얻어 그해 4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개교를 하였다. 이 학원의 이사장겸 원장은 김대현 장로가 맡았으며 교수는 김재준 윤인구 목사 등이었다.
 

1940년 평양신학교가 개교되자 남한 출신들은 조선신학원에 진학하였으며 북한 출신들은 평양 신학교로 진학하였다. 한편 1941년 제 30회 총회가 개회되자 국민의식이라 하여 동방요배 황국신민서가 기미가요(일본국가) 신사참배 등을 실시하고 총회를 개회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의식은 지방교회에서도 실시하였다. 안건 중 소위 애국기 헌납이라 하여 교인 1인당 1천 원씩 헌금을 실시하기로 결의하였으며 국민정신총동원총회연맹을 총회를 비롯해서 각 노회ㅣ 개교회까지 조직케하여 애국반을 운영하면서 침략전에 사용할 쇠붙이를 모집하였으며 심지어 교회종까지 헌납토록 하였다.
 
여기에 교회 성직자는 물론 일반교인들에게까지 창씨 개명을 강요하였다. 애국반을 중심했던 활동은 조선군 사령부 환자용 자동차 3대와 전투기 1대를 헌납하는 등 일본 대동아공영권에 절대적으로 협력을 하였다. 1942년 10월 제31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회됐다.

이어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지지하는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때마침 조선총독부에서는 창씨개명 조선인 징용 지원병 여자근로정신대를 강제로 징용해 갔으며 징용병은 탄광으로 군사노동자 지원병은 총알받이로 전선으로 나갔으며 여성근로정신대는 일본군 성노리게 깜으로 끌고 갔다. 일본은 1942년부터는 각 교단을 해산하려고 준비 중에 있었으며 1943년 5월7일 일제의 강압 의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해산되고 동시에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이 출범하였다. 따라서 각 노회는 각 교루고 명칭을 바꾸었으며 초대 통리에 채필근 목사가 선출됐다.

 

이후 한국교회 목사들은 일본 성지순례라하여 각 교단별로 일본 동경에 있는 활거를 비롯해서 야스쿠니 신사 이세신궁 가시하라신궁 해이안 신궁 등을 참배하고 돌아 온 일이 계속적으로 진행됐다. drjt도 잠시뿐이었다. 태평양젅ㅇ을 일으켰던 일제는 폐전이 짙어지면서 1944년 봄부터 각 지역의 교회를 하나로 통폐합하고 수요일밤과 주일밤 예배를 금지시켰다. 다시 1945년 7월 한국에 있는 모든 기독교를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으로 명칭을 바꾸고 초대 통리에 김관식 목사를 총무에 송창근 목사를 선출하였다. 이때 각 교단 대표들이 정동감기료괴에 모여 투표는 하였지만 개표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개표하는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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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한국교회 재건 - 교단 분열

 

그리고 연합군은 해가 갈수록 일본의 압박하면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으며 다시 8월 9일에는 나가자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도시인구의 절반의 살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일본 천황은 1945년 8월 15일 낮 정오 뉴스 시간을 이용하여 종전(패전)을 선포함으로 전쟁은 종결됐다. 이일로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목회자 및 일반 신도들이 옥문을 박차고 나왔으며 문을 닫았던 교회들이 다시 문을 열고 주일 밤과 수요일 밤에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을 만끽하였다. 출옥 성도 50여명은 한상동 목사를 중심해서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 한국 교회 재건을 선포하였다.
 
그해 11월 평북 선천 월곡동 교회에서 평북노회 등 6개 노회 200여명의 교역자들이 자숙 논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 참석했던 증경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친일파로서 이를 거부하고 “옥중에서 고생한 목사나 신사 참배를 하면서 교회를 지킨 사람들이나 다 같이 고생하였다 면서 신사참배에 대한 죄의 책별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라” 고 항의를 하자 결국 이 모임은 결론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무너진 제단을 그냥 방치 할 수 없어서 그해 1월 초에 이북의 5도 16개노회가 연합하여 북한 5도 연합회를 조직하고 통일이 될 때 까지 총회를 대행해 갈 수 있는 조직을 하였다. 초대 회장에 김진수 목사를 선출하였다. 5도 연합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의를 하였다.  
 

1.북한 5도연합회는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 총회를 대행할 수 있는 잠정적 협의기관으로 한다
2. 총회의 헌법은 개정 이전의 헌법을 사용하되 남북 통일 총회가 열릴 때까지 그대로 둔다.
3. 전교회는 신사참배의 죄과를 통회하고 교역자는 2개월간 근신한다.
4. 신학교는 연합노회 직영으로 한다.
5. 조국의 기독 문화를 목표로 독립기념전도회를 조직하여 전도교화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6. 북한 교회를 대표하는 사절단을 파송하여 연합국 사령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로 한다. 
 
이상과 같은 결의를 하였지만 소련군의 힘을 얻었던 북한의 실력자인 김일성의 탄압으로 이 일은 이루지 못하고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첫 북한교회의 수난은 1945년 11월 6일 용암포지역에서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결성하였다하여 탄압을 받으면서 교인 및 하생 시민 5천여명이 신의주 공산당 본부로 집결하고 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 퇴각운동을 벌릴 때 소련군과 공산당들은 무차별하게 총격을 가하여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기독교지도자들이 많이 구속되었다. 이를 가리켜 신의주 학생사건이라 부르고 있다.

 

다시 평양에서 1946년 3.1 절 독립 기념식을 거행할 때 평양교역자회에서는 그 장소를장대현 교회로 정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은 평양역전에서 기념식을 갖는 등 양 세력이 긴장감속에서 기념식이 거행됐다. 그런데 뜻하기 않게 역전 기념식에 수류탄 투석 사건이 발행하여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기독교 교인들이 조작하였다 하여 탄압이 일기 시작하였다. 같은 11월 3일 주일에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한다는 공포가 있자 교계에서는 이를 반대하였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또 탄압을 받게 됐다. 이 무렵 공산당의 실력자인 강양욱 목사를 중심해서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고 증경총회장 김익두 김응순 목사를 강제로 가입시키고 초대 위원장(총회장)에 박상순 목사를 선출하였다. 이들은 11월 3일 주일에 실시하는 선거에서 즉시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내는 등 모든 목사는 이 연맹에 가입토로가 하였다. 만일 가입하지 않으면 많은 불이익을 당하는 고통이 그칠날이 없었다. 신앙의 자유를 빼앗겼던 많은 목사와 일반 신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혼자 또는 가족을 이끌고 38선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월남했던 일이 많았다.


 
 

 

남한은 미군의 진주로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무너졌던 제단을 재건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일부 교계지도자들은 과거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세력들도 있었다. . 그러나 이를 반대하고 먼저 감리교회에서 독자 노선을 택하면서 이탈하게 됐다. 장로교회에서도 각 지방에 있는 교구를 노회로 복구 시키고 1946년 6월12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장로회 총회 남부대회를 개회하였다. 대회장은 배은희 부대회장 함태영 목사를 선임하여 헌법은 통일될 때 까지 그대로 사용키로 하였으며 제 27회 총회가 범죄한 신사참배결의는 취소하였다. 
 


교역자 양성은 조선신학원을 직영신학교로 결의를 하였으며여장로 안수 문제는 통일될 때 까지 보류하기로 하였다.
1947년 4월 제 2회 남부총회로 모였으며 이 남부총회를 대한예수장로회총회로 이름을 바꾸고 1942년 제 31회 총회가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해산되었기에 에 그 역사를 이어야 한다면서 제 2남부 총회를 제 33회 총회로 계승하기로 결의를 하여 그 회수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때 1947년 제 32회 총회와 제 33회 총회 총회장은 1924년 총회장직을 역임했던 이자익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임하였다.
부산을 중심으로 고려신학교가 출범하면서 1차로 교회 분열은 시작되었다.
1946년 5월 한상동 박윤선 주남선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경남 진해에 모여 보수신학의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였으며 따라서 그해 6월에 제 1회 하기신학강좌를 개설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총회 인준을 받으려 하였지만 
 

실패하자 만주신학원에서 교수했던 정통보수의 대부인 혁형룔 박사를 교장으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신학교 운영 문제와 신학노선 차이로 더 이상 머물수가 없었던 박형룡 박사는 1948년 서울로 상경하여 개인적으로 월남한 이북세력의 힘으 얻어 한국 보수 신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면서 남산 조선신궁 자리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무렵 조선신학교 재학생 51명이 김재준 목사의 신학벙법론으로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면서보수와 진보가 서로 충돌하게 됐다. 이 문제로 1948년 4월 제 34회 총회가 모인 새문안교회내에는 조선신학교 
 
 


재학생과 진정서를 받고 심의하는 과정에서 고성이 오고갔으나 해결을 보지 못하고 6.25전쟁을 만나게 됐다. 여전히 부산에서는 고려신학교 장로회신학교 조선신학교가 계속해서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총회 내의 신학교 문제로 갈등이 증폭되자 1951년 5월 피난지 부산에서 모인 제 36회 총회에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 직영신학교를 각기 취소를 하고 그 해 9월 피난지 대구에서 총회가 직영하는 신학교라 하여 총회신학교를개설하고 교장에 감부열 선교사를 임명하였다. 
 

이로서 대구에서 문을 연 총회신학교는 보수진영에 있던 신학생들은 이곳에 입학하여 수업을 맏았으며 이 무렵 감부열 교장이 안식년을 맞아 도미하자 곧 임시 교장으로 박형룡 박사가 교장직무대행을 맡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고려파는 고려파대로 부산을 중심해서 자리를 잡데 됐으며

1965년 6월 조선신학교(후 한국신학대학) 출신 및 김재준 목사 지지 세력들은 총회를 이탈하여 서울 동자동에 위치한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고 김세렬 목사가 초대 총회장이 됐다.

이 겨로가 한국교회는 같은 장로교회인데 3개파로 분열 되었다.

막형룡 박사는 한국교회의 주류인 보수정통신학의 자리를 잡고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를 이끌고 갔었다.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자 이와 때를 같이해서 1954년 4월 옛 조선신궁자리로 이전하였다. 당시 학제는 예과 2년제 본/별과 3년제였다. 다시 학교명을 대한예수고 장로회신학교로 하고 수업을 계속 진행해 오다가 장로회신학교 신축을 위해 옛 조서신궁 부지를 불하 받기 위해 교섭을 해 오던 중 학교 재정 3천만환의 사기 사건이 발행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사회에서는 독 1959년 3월 이사회를 개회하여 일단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박형룡 박사는 명예고수로 남게 하고 교장서리는 노진현 목사를 임명하고 수습하려고 하였지만 이 일이 전국교회에 알리어지자 두 세력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박형룡 박사의 사기범에 걸려 날려버린 3천만환 사건은 전국 노회와 교회로 확산되면서 봄노회를 맞이하게 됐다. 이 때 서로 자파세력을 강화하려고 안간힘을 쏟기도 하였다. 이 일로 경기노회 총대 명단이 각각 다르게 접수되자 총회를 개회하기 전에 에큐메니털파와 NAE 파 의 명단을 놓고 투표를 하여 에큐메니컬파의 총대 명단을 받아들이고 개회를 사였지만 
 

계속해서 NAE 파에서 무효를 주장하면서 에큐메니칼파는 용공주의 신신학 단일교회 운동이라고 왜친 소리에 장내가 몹시 소란하게 됐다이 일로 더 이상 총회를 계속 할 수 없어서 총회장 노진현 목사는 정회를 선언하고 나자 회의장내는 더욱 소란해지면서 에큐메니칼파와 Nae 파가 갈라서게 됐다.

에큐메니칼파는 즉시 서울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하였으며 총회장에 이창규 목사가 피선됐다. 후에 이 파를 통합측이라 부르게 됐다.

nae 파는 합동측이라 부르게 됐으며 그해 11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하고 양화석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자 예장은 두 교파로 분립하게 됐다.

 

그 후 두 파가 서로 등을 돌리고 갈라서자 자연히 남산에 소재하고 있던 장로회신학교도 둘로 갈라지게 됐다. 1959년 9월 이사회에서 계일승 박사를 교장으로 선임하였으며 이 일로 신학교에 교장이 2명이나 됐다.통합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통합측은 광나루에 교사를 마련하여 장로회신학교라 부르게 됐고 합동측은 ICC(국제 기독교연합회)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용산 역전에 빌딩을 매입하여 총회신학교라는 간판을 내결로 신학교를 운영하였다.
이 일로 함께 공부했던 많은 이들이 상처를 안고 서로 갈라서야 하는 아픔을 격게됐다.

현재는 통합 측의 신학교는 장로회신학대학교로 발전하였으며

역시 합동측도 그 후 사당동에 자리잡고 총신대학교로 발전하여으며. 사당 캠퍼스는 학부만 운영하고 신대원은 경기도 용인시 양지리 캠퍼스에서 운영하고 있다.

두 신학교 모두 2001년 학교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갖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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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성장과 민주화 운동

 

 

한국교회의 성장은 6.25 전쟁을 통해서 이북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수 많은 목회자와 일반 신도들이 월남하면서 남한 교회의 성장에 밑거름이 됐다. 여기에 6.25 전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의해 엄청난 교회 손실과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6.25 전쟁이 휴전으로 성립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정말중에 있었지만 팝 피얼스 빌리 그레함 전도자들의 대대적인 부흥운동을 일으키면서 교회는 더욱 자리를 굳게 잡아 갔었으며 여기에 교파 분열로 자파의 교세를 확장키 위해서 안감힘을 쏟으면서 교회는 성장하게 됐다. 여기에 70년대를 맞이하면서 농총 인구가 도시로 모요 들면서 대형화된 교회가 하나 둘 생겨나게 됐다.
여기에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쿠테타 후 군가 독재 정권을 창출하여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산업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인권탄압 등 비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해 오다가 10월 유신헌법 발표 등으로 군사독재가 장기화 되었다. 이때 한국 교회 즉 에큐메니칼 노선에 있던 교회들은 민주와 운동에 팡장을 섰으며 그 후 1979년 10월 26일 자신의 부하에 의해 청와대 안가에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그 수 서울의 봄이 올 줄 알았던 수많은 시민학생들은 그 봄마저 만나지 못하고 12.12 신군부의 전두환 장군 등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전국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고 갔었다. 1980년 5월 18일 전국에 게엄령을 선포하자 광주지역 시민학생들이 5.18 게엄령을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전두환 군부세력 퇴진을 요구하자 특수부대를 광주에 투입하여 결국 광주는 시민군과 특수부대와의 전쟁이 치열하였다.
이 일로 광주의 수 많은 시민 학생 및 기독교 지도자들이 골고다의 십자가를 메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면서 싸움을 하였지만 엄청난 민주인사들이 살상을 당해야 하는 역사를 만나게 됐다. 
 
 
 
 총회에서는 박치순 부총회장이 광주의 비극을 접하고 전국교회에 기도와 구호품을 요구하였고 많은 교회가 참여 하자 박치순 부총회장은곧 광주로 내려가 총회장 조원곤 목사(광주 양림교회)에게 구제금을 전달하고 이어 증경총회장 한환석 목사(광주제일교회)를 만나 위로하고 진상을 파악한 후 상경하였다. 광주의 그 엄청난 사건을 민간이 나서야 한다면서 한완석 목사가 광주사태수숩위원장이 되어 총무 이인국 목사(남광교회)와 함께 광주 시내 교회 목사들과 함께 우선 억울하게 총탄에 쓰러져 죽어간 시신을


 

광주도청 상무관에 옮겨 놓고 유족들의 확인을 받은 뒤 입관을 하고 이들이 영원히 쉴 수 있는 광주의 망월동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던 박치순 부총회장은 곧 상경하여 5월 30일 서울 교역자들이 서울 연동교회에 모여 보고를 득릉 후 6월 1일 전국 교회가 광주 5.18 희생자를 위한 기도회를 갖기로 하고 전국 교회에 알렸다. 박치순 목사는 그해 9월에 총회장이 됐다. 그 후 본 교단에서 민주와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1987년 군사독재정부는 4.13 호헌을 선포하자 즉각 교계는 물론 일반 시민학생들은 호헌을 철폐하고 대통령은 직선제로 선출하자는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 해 5월에는 총회장 장동진 목사(광주 서림교회)께서 4.13 호헌철폐를 위한 목회서신을 전국교회에 발송하였다. 역시 6월 10일 서울 시민학생들이 일제히 호헌철폐를 부르짖으면서 거리로 나섰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았던 총회에서는 그냥 있을 수 없어서 6월 22일부터 23일 총회인권위원회 주최로 호헌철폐를 위한 기도회를 새문안교회에서 갖고 소형 십자가와 촛불을 들고 종로 5가까지 시가행진을 하려고 교회 문을 나서자마자 경찰관의 체류 탄으로 더 이상 진출을 못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 철야기도를 갖고


 
그 다음날 아침까지 기도회를 갖기도 하였다. 교계와 일반 시민들의 강한 저항을 받았던 당시 전두환 대통령 후계자였던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4.13 호헌을 철폐하고 식전제로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발표가 나자 전국에 픝어져 있는 시민은 말할 것 없고 본 교단에 속한 모든 목회자와 교인들은 즐거워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면서 매년 총대가 증가하자 1,880명까지 이르게 된 일이 있었다. 이를 1,500명으로ㅗ 제한을 하여 작은 노회에 총대수를 많이 배정하고 큰 노회는 숫자를 줄이기도 하여 현재는 1,500명으로 제한하였다.  

그동안 숙제로 남아왔던 여성안수문제가 민주와희 열기와 함께 1994년 9월 제 79회 총회에서 해결됐다. 그동안 꾸준하게 여성안수를 위해 노력했던 여전도회전국연합회 및 전국 여교역자연합회 전국여신학생연합회의 노력으로 이 일이 이뤄졌다.이 일로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가 탄생되는 기쁨도 갖게 되어 그 어느 때보다 여성의 역할이 교회에 큰 몫을 담당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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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창립 90주년과 21세기를 향한 총회

 

지난 2002년 9월이 총회창립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90년의 역사를 갖게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제의 탄압과 6.25전쟁 그리고 같은 믿음의 형제들이 서로 갈라서야 하는 아픔을 안고도 오직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부활 신앙을 믿고 큰 교단으로 성장해 왔다. 한국에서 가장 교단으로는 예장 통합측, 합동측 이렇게 2대 교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금 21세기를 맞이하고 전진하고 있는 총회는 총회기구개력을 통하여 작은 총회 본부로 조정을 통하여 지방화 시대를 열어 많은 업무를 지방으로 이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여기에 개 교회마다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교회와 총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남북이 나누어져 있는 상황 속에서 
 

남한은 풍요로운 삶 속에서 살고 있으며 북한은 그렇지 못한 형편이다. 북한은 벌써 여러 해 가뭄으로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생명이 200만 명 된다니 기가 막힌 일이다. 동표의 아픔을 깨달았던 우리 총회는 북한 돕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총회 사회부에서는 매년 추운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서 옷보내기운동을 비롯해서 많은 구호물자를 보내고 있으며 농어촌부에서는 북한농업돕기운동 일환으로 매년 못자리 비닐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일은 개 교회에서도 북한에 밀가루를 보내기도 하고 아예 국수공장을 만들어 북한 어린이의 양식이 되도록 힘을 기울이고 있다. 먼 훗날 남북이 하나 될 때 남한 교회의 도움으로 생명을 얻어 살아나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할 때 그들은 자연히 기독교인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1990년 7월부터 2002년 7월까지 8회에 걸쳐 일본에서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주관으로 한국에 있는 본 교단을 중심해서 6개 교단들 대표자들이 조선그리스도연맹 대표자들과 만나 서로 화해와 일치 선교 여기에 평화적인 통일을 바라는 이 만남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이미 북한에도 평양봉수교회 칠골 교회 등 가정교회에서 모여 예배에 참여한 신도가 1만 2천여 명이나 모인다고 하니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이들의 교회도 남한 교회의 힘을 입어 성장하기를 바라고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남한 신도들의 기도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싶다.

 

21세기를 맞이하는 본 교단은 2005년 12월 말 현재 62개 노회에 7,292개 교회가 있으며 일반 신도는 2,539,431명이다. 세례교인은 1,427,806명 목사는 12,223명 장로는 21,729명이나 되는 교회로 성장했다. 여기에 교단 총회 상임부서로는 교단 행정본부를 비롯해서 국내선교부, 세계선교부, 교육자원부, 사회봉사부, 총회 훈련원, 총회 유지재단, 한국기독공보사, 한국장로교복지재단, 총회 연금재단, 한국장로교출판사,상임부서에는 책임자가 있다. 여기에 총회 안에 상임위원회,상임특별위원 등 도합 20여개가 있다. 여기에 총회 산하 기관으로 남선교회전국연합회,여전도회전국연합회,청년회전국연합회,교회학교아동부연합회,중고등부연합회 등이 있어서 자체적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 특별히 남선교회전국연합회에서는 러시아에 이흘애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곳에서 모스크바장로회신학대학교를 운영하는 등 러시아 현지인을 교육시키고 있으며 과거 지하교회 교역자들을 재교육시키는 교역대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여전도회연합회도 자체 센타를 갖고 있으며 여성 교육에 힘을 쓰는 한편 해외 군선교등 선교에 힘을 쏘고 있다.

 

여기에 교단에서 직접 운영하는 7개의 신학대학이 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호남신학대학교, 전주한일장신대학교, 영남신학대학교, 대전신학대학교, 부산장신신학대학교, 서울장신대학교이 있다. 여기에 6개 종합대학교가 있다. 즉 연세대학교 숭실대학교 계명대학교 한남대학교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이며 노회가 운영하는 7개 전문대학(계명문화대학,서해대학,광주보건대학,기전여자대학,예수간호대학,광주기독간호대학,포항선린대학)이 있다 7개,기전여자대학,예수간호대학,광주기독간호대학,포항선린대학)이 있다. 각 지방에 있는 23개 중고등학교와 평신도지도자 양성기관인 2년제 성서신학원은 30개나 된다. 7개의 자선사업단체와 7개의 종합병원(전주예수병원,광주기독병원,대구동산의료원,안동성소병원,부산일신기독병원,포항선린병원,실로암안과병원)이 있다.

 

또한 세계선교를 위해서 선교사는 80개국에 395가족이 나가 있으며 이 가운데 장기,단기,견습 선교사 등 모두 702명이 세계 구석구석까지 나가 활동하고 있다. 여기에 세계교회와의 유대관계는 WCC (세계교회협의회),EACC(동남아기독교협의회), WRCA(세계개혁교회연맹) 등이 있다. 여기에 가까운 일본 기독교단을 비롯해서 재일대한기독교회, 대만기독교장로교회, 태극기독교회, 중국기독교회, 인도마토마교회, 북동인도 장로교회, 인도네시아예수그리스도교회, 멀리는 미합중국장로교회를 비롯해서 미주 한인장로교회, 미국개혁교회, 캐나다장로교회, 브라질 장로교회, 네델란드 개혁교회, 독일서남지역교회, 스위스 개신교회연맹, 체코형제교회, 스코드랜드 교회, 가나복음교회, 자레이칸샤사장로교회, 호주연합교회, 뉴질랜드장로교회 등 21개 교회와 자매 교회를 맺고 있다.
국내연합사업기관으로는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 대한 성서공회,대한 기독교 서회, 한국기독학생연맹,한국기독교교육협회, CBS, CATV , 한국찬송가공회 등 여러 기관에 이사를 파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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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예장통합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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