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선교사, 대구에 사과를 들여오다 - 헨리 브루엔 선교사 가족 제공 영상
대구를 사과의 고장으로 만든 건, 선교사들이 사과나무를 들여와 청라언덕에 심기 시작하면서부터.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조선을 찾아 무려 42년이나 살았던 선교사 ‘브루엔’도 사과 농사를 지었다.
전도를 위해 대구는 물론 경북 지역 곳곳을 찾았던 그는, 우리말을 완벽하게 구사했다. 한국 이름은 ‘부해리’. 자동차를 타고 온 키 큰 서양인을 구경하러 몰려든 동네 사람들을 특유의 친화력으로 사로잡았다. 조선인을 향한 그의 친밀한 시선이 단오 풍경, 여인과 아이들의 일상을 세세하게 촬영한 필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새롭게 발굴한 3.1만세운동의 기록자, ‘오웬스’ - 캐나다 연합교회 아카이브 수집
"오웬스는 3.1운동을 ‘혁명’이라고, ‘레볼루션(revolution)’이라고 표현해요.
이것은 세계인들이 관심을 갖고서 주목해야 될 굉장한 일이다"
캐나다 출신 선교사 ‘오웬스’는 조선에 10여 년간 머물렀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번 아카이브 발굴 작업 과정에서 그가 상세하게 기록한 3.1 만세운동 자료가 발견됐다.
‘오웬스’가 근무했던 현재의 세브란스 병원은 당시 서울역 앞에 있었고, 덕분에 그는 3.1 만세운동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하고 참가한 이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며 참상을 기록할 수 있었다. ‘오웬스’는 이 글과 사진들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지지를 이끌어내기를 바랐다. 그는 격동의 시기를 겪던 조선의 한 가운데에서, 역사의 기록자로서 살았다.
전국 각지의 여인들이 몰려든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 - 미국 장로교 역사협회 수집
기독교 불모지였던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일군 건, 미국에서 온 선교사 ‘모펫’이었다. 그러나 평양의 모습을 기록한 영상에서 특히 눈여겨 볼만한 것은 성경공부 모임인 사경회. 전국에서 1,000명 이상의 여성 교인들이 몰려들었는데, 12일이나 교회에 머물러야 하기에 본인은 물론 아이들 먹을 것, 입을 것까지 싸서 머리에 이고 걷고 또 걸어온다. 사경회에서, 한글과 성경이 보급과 전파에 서로 힘을 싣게 된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처음부터 선교 방침이
남자보다는 여성, 대도시보다는 중소도시나 농촌 이런 쪽으로 선교에 초점을 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성들이 많이 교회에 나오고 여성 중심으로 하다 보니까
한문을 모르니까 한글(관련 내용)을 많이 개발했죠."
평양 대부흥운동을 이끌었고, 전국을 돌며 사경회와 부흥회를 진행하면서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한국인 목회자 길선주 목사와 모펫 선교사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공개한다.
조선 가장 낮은 곳을 기록하다.
조선 최초의 여학교 ‘이화학당’을 설립해 여성들에게도 ‘배움’이라는 꿈을 심어준 ‘스크랜튼’, 서양 의학기술을 들여와 환자들을 돌본 전주 병원의 ‘보그스’ 원장... 100여 년 전 새벽의 나라를 찾았던 영상 속 선교사들은, 당시의 가장 평범한 조선인들의 일상과 함께했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제가 이걸 보면서 그 안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 대화를 계속 걸었거든요.
본인의 편견이나 이런 것들이 드러나지 않게 찍은 게 동영상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좀 많이 발굴해서 더 많이 연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에서 배척받던 한센인들에게 삶의 터전이 되었던 대구 애락원 김장철 풍경. 또 길거리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국밥을 말아먹고, 엿장수 좌판에 몰려들어 군것질을 하고, 지게에 짐을 잔뜩 싣고 바쁜 걸음을 옮기는 장터를 촬영한 영상은 조선을 낯선 여행지가 아닌, 자신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낸 선교사들의 ‘진짜’ 삶을 통해 남겨진 것들이다.
1900년대 초,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이 직접 기록한 조선을 5월 9일 목요일 밤 10시 KBS1TV KBS 현대사 아카이브 <‘선교사들, 조선을 기록하다’- 새벽의 나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로그램 제작에 사용된 영상의 원본은 KBS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공동 운영하는 현대사 아카이브(archives.kbs.co.kr)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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